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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19 (19:27:10)
월말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 심지어 졸업고사에 입시지옥에 이르기까지. 시험에 시험이 꼬리를 물던 학창시절 시험만 치르고 나면 책상 구석구석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어 놓았던 '즐비한 지식의 시체'가 손바닥에 팔꿈치에 묻어나면 한 두 문제 맞추었다는 생각보다 웬지 씁슬함에 후회가 되곤했었습니다.

광고를 업으로 삼아, 그것도 크리에이티브를 계속 양산(?)해 내야하는 처지에 놓인 카피라이터의 입장에선 알고있는 지식을 총 동원해서, 마치 시험 답안을 작성하는 것처럼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만 늘 '말과 글'의 가뭄에 허덕이곤 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카피를 잘 못쓸까?'하는 자괴로부터 디자이너나 PD의 아이디어에 신세를 지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파트너십으로 하는 일이기에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시너지효과를 거두기도 하는 게 크리에이티브 작업입니다.

책을 많이 읽거나, 영화를 많이 본다거나 하는 등의 일이 좋은 광고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들을 많이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여유롭지만은 않습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끔은 컨닝을 합니다. 그렇다고 시험처럼 감독관의 눈치를 본다거나 좋은 점수를 위해서는 아닙니다. 사실 컨닝이라고 하지만 평소에 스크랩해두었던 신 문, 잡지에서 혹은 책에서 감명 깊었던 구절 등을 메모해 둔 것을 참조하는 수준 입니다. 아니면 생활 속에서 느꼈던 단상들도 좋구요. 요즘은 인터넷 검색엔진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하기야 노하우(know-how)시대가 아니라 노웨어 (know-where)시대라고 하는 이야기 까지 있는 요즘이니까요.

이 자리를 빌어 제 카피의 컨닝페이퍼를 밝힐까 합니다.

페이퍼1. 제 책상 유리판 밑에 2년간 자리했던 서산대사님의 선시입니다.
눈 덮인 들길 걸어갈제
행여 그 걸음
아무렇게나 하지 말세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저 보다 먼저 김구 선생님께서 자주 읊으셨던 시인데 올 초 D증권 기 업피알에서 유감없는 위력을 발휘했었습니다.(이모장관께서 이임사에 재 인용하셨다는 후일담)

페이퍼2. 여성의류 광고에 인용했던 S.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나오는 글입니다. <여자는 항상 뒤돌아보며 걸어온 길의 길이를 재고있기 때문에 약진력 이 줄어들고 만다>를 꽤 여러해 전에 모피광고에서 "여자는 걸어온 길의 길이를 잰다"로 줄여 사용했었습니다. 패션카피도 그저 말장난이 아닌 깊이와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서 써 봤습니다.

페이퍼3. 여성 생리대 광고인데 집사람과 연애시절에 경험을 바탕으로 했으니 컨닝은 컨닝입니다. "한달에 한번 여자는 마술에 걸린다." 사실 몸으로 체험한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카피라이터도 가끔은 컨닝을 합니다. 아니, 컨닝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모방이나 표절은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떨림과 울림을 남길 카피를 쓰기위해 오늘도 수많은 광고인들이 밤을 밝힙니다. 15초 광고에는 15일 아니 그 이상의 땀과 눈물이 담겨있습니다. 소비자의 행복한 광고읽기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이희복 (카피라이터,오리콤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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